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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스토리

[왕의 남자]외줄 위의 세 남자 - 나, 거기 그리고 여기

by yeon joo 2022. 11. 17.

이진이/칼럼니스트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영화 <왕의 남자> 초반부, 함께 어울리던 남사당패의 수장을 찌르고 도망친 장생과 공길이,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핀 들판에서 장님 흉내를 내며 나누던 대화의 일부이다.


'내가 여기 있으니, 네가 거기 있다', 혹은 '네가 거기에 있기 때문에 내가 여기에 있다'라고도 들리는 이 대사는 영화 속 인물들의 관계 설정과 그로 인해 이어지는 극적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또한 극 전체의 발단과 전개, 반전과 클라이맥스로 이끄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왕의 남자>의 매력은 이 대사가 함축하듯, 인물들간의 긴장관계와 역전 관계에 있으며, 그것은 '나와 너' '여기와 거기'에 집약돼있다 할 것이다. 마치 외줄타기를 위해 두명의 광대가 양쪽 끝에 나란히 서있는 것처럼. 그러나 외줄 위의 그들이 한 걸음을 내디딜 때부터 이 긴장감은 생사를 담보로 한 운명의 놀이판이 되고 만다

 

장생과 공길

장생과 공길은 언제부터 함께 한 것일까? 영화 초반부에 그들이 몸담고 있었던 남사당패들도 그들과 오래 했던 것 같지는 않다. 장생과 공길은 처음부터 둘이었으며, 재주 하나 믿고 세상을 훨훨 날아다니던 그야말로 자유인이었다. 어지러운 세상, 그저 한판 오지게 놀다가면 그뿐이라는, 천생 광대인 장생은 여리고 소심한 공길에에게는 아버지이자 벗이며, 형님과 같은 존재다. 또 한편으로는 남편이나 연인이며, 오라비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장생과 공길 사이의 긴장감은 그들의 관계의 모호성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평생 함께 길을 걸어가야할 동행이면서도 그들에게는 동행 이상의 끈끈한 친밀감이 있다. 이것은 공길의 성적 정체성이 애매모호해지는 시점에서 시작되는데, 그 덕분에 장생과 공길 사이에서 관객들은 묘한 성적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정말 형제나 친구일 뿐일까? 혹 연인은 아니었을까...라고. 이처럼 그 정체는 비록 모호하나, 누가 보아도 돈독하다 못해 연인들에게서나 봄직한 질긴 인연을 보여주던 장생과 공길의 관계는 그들이 한양에 당도하면서 흩어지기 시작한다. 바로, '왕의 남자' 중 왕, 연산군이 그들 앞에 등장한 것이다.

 

공길과 연산군

 

 

연산군은 모두가 잘 알다시피 조선시대 유일의 패주이다. (광해군을 연산군과 같은 선상에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성군으로 꼽히는 성종 임금의 아들이었으나, 그의 어머니 윤씨가 사약을 받고 죽는 바람에 연산은 애초보다 성군의 자질보다도 폭군의 자질을 키워가야 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애미 없는 자식으로 커오면서 연산은 성장기는 순탄치 못했다. 사약을 받고 죽었기에 연산의 어미, 폐비 윤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궁중 내에서 엄격히 금기시됐으며, 연산은 그 금기의 억압 속에서 점점 삐뚤어져갔으며, 그만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더 커져갔다.

 

 

그러한 연산을 구원해준 것이 장녹수였다. 기생 신분인 녹수가 왕의 첩실로까지 들어가게 된 것은 연산의 영혼 속에 비어있는 한 구석, 즉 어머니의 자리에 그녀가 들어와앉았기 때문이다. 결핍은 늘 그리움을 낳는다. 그 그리움의 자리를 녹수가 꿰찬 것이다. 그러나 그리움 또는 욕망이라는 이놈은 항상 인간을 배고프게 한다.

욕망은 채워지면 채워질수록 늘 새로운 것을 갈구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애시당초 인간의 그리움과 욕망을 완벽하게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연산은 녹수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불안하고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다. 아마도 어머니 윤씨가 다시 환생해서 그를 보듬어준다고 해도 이미 깊어질대로 깊어진 연산의 배고픔을 채워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세상을 처음 만들어낸 시간의 신 크노소스가 자신의 자식을 낳은 족족 먹어치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것처럼, 그 역시 그의 허기를 달래주기 위해 등장하는 것들을 보는 족족 삼켜버리게 될 것이다. 언젠가부터 연산은 허기를 채우기에 급급한 괴물이 돼버린 것이다. 공길 역시 예외는 아니다.

공길의 등장은 연산군에게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녹수와는 다른 방법으로 공길은 연산군의 허기를 달래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연산군은 공길에게서 희미하게나마 어머니의 또다른 모습을 발견한 것 같다.

 

녹수가 그를 가슴으로 품어줄 어미라면, 공길은 유아기에만 머물고 있는 연산군과 함께 놀아주는 어미이자 누이이며 친구인 것이다. 외로웠던 연산의 어린시절을 공길이 조금씩 채워줬다고나 할까?

 

공길이 점차 연산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도 어쩌면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어있던 모성의 발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공길과 연산 간의 긴장감은 이렇게 시작되고 발전됐으며, 그것이 결국은 되돌릴 수 없는 비극을 낳게 된다. 공길은 그의 옛 연인 장생에게 돌아가기엔 새로운 연인 연산에게 너무 많이 와버린 것이다.

 

다시 공길과 장생

 

장생과 공길이 우여곡절 끝에 궁으로 들어가게 되고, 정말 극적으로, 연산군 앞에서 그들의 재주를 인정받는다. 그러나 연산군을 매혹시킨 것은 바람처럼 훨훨 날아다니고 싶어하는 장생보다 묘한 매력을 띤 공길이다. '윗 입술을 줄까, 아랫입술을 줄까'로 연산의 웃음보를 터뜨린 장면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때부터 장생과 공길의 관계는 역전되기 시작한다.

 

궁에 들어오기 전, 장생과 공길의 관계에서 그 우위를 선점하고 있는 것은 장생처럼 보인다.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도 장생이며, 공길은 장생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둘이 함께 하지 않으면 단 하루도 살아가기 힘든 것은 공길이 아니라, 장생일지도 모른다. 옥신각신 다투긴 해도 마지막 순간에 장생은 공길의 뜻을 따랐으며, 그를 위해 광대에게는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눈까지 내놓지 않는가?

 

그런 장생과 공길 사이에 연산군이 들어오면서 그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닿는다. 세 사람 중 표면적으로 가장 큰 힘을 가진 이는 연산군이지만, 이 세 사람의 관계에서 진정 힘을 휘두르는 것은 공길이다.

 

영화 속에서는 공길이 매우 부드러운 인물로 묘사됐지만, 원작인 연극 <이爾>에서 공길이 권력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것을 떠올려보라. 공길의 내면에 잠재돼있는 것을 영화를 덜 드러내고, 연극은 노골적으로 드러냈지만, 결국 세 사람의 관계 속에서 가장 막강한 파워를 휘두르는 것은 공길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외줄타기의 파트너 공길 없이 혼자 서있는 장생은 외롭다. 왕의 마당 앞에서 홀로 외줄을 타는 장생의 모습은 비루한 세상을 떨쳐버리고 훨훨 날아오르는 자유인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외로움에 몸서리치는 한 인간의 몸부림 같다.

 

그랬기에 공길은 장생의 줄타기에 눈물을 흘린다. 저 외줄타기의 맞은편에 있어야 할 이는 누구인가? 혼자서 외줄타기를 하는 장생의 모습은 너무나 낯설고 슬퍼보이지 않는가?공길은 방황한다. 내가 있어야할 자리는 어디인가? 동굴처럼 텅 비어보이는 연산의 옆자리, '저기'인가? 아니면 혼자 줄을 타면서 울부짖는 장생의 외줄 건너편 '저기'일까?

 

나 여기에 있고, 너는 거기에 있다

 

영화는 그 결말을 열린 상태로 끝을 맺고 있다. 공길이 장님이 된 장생과 함께 줄을 타면서 하늘로 훨훨 올라가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다시 태어나도 광대가 되고 말 것이라 외치면서 신명나게 줄타기를 한다.

 

하지만 장생도 공길도 광대로 태어나겠다고 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광대는 무엇인가? 그들이 원했던 것처럼 세상에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자유로운 존재였던가?

 

광대란 누구에게도 매여있지 않은 자유인이며, 번잡스러운 인생, 그저 재미나게 한판 놀고가면 그뿐인 것이 광대의 삶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저토록 소리높여 외치는 것은 아닐까? 어느 시대든 광대는 완벽하게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으며, 그들이 원했던 것만큼 한없이 질펀하게 놀았던 적도 없지 않았던가?

 

그네들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다. 광대는 누군가를 위해 놀아야 한다. 저 혼자 노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호흡하며 논다. 세상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번다한 인간사를 비꼬고 뒤틀면서 논다. 사람들은 거기에 함께 웃고 운다. 결국 광대는 가렵던 등을 긁어주며, 웃고싶어하는 이를 배꼽 빠지게 하고,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준다. 광대의 자리는 '거기'일지도 모른다.

 

공길은 왕의 남자로 머물 수 없었다. 한때 그의 자리가 왕의 옆자리, '거기'였는지 몰라도, 공길의 '거기'는 늘 부유한다. 똑같은 이유로 장생의 옆자리 역시 공길의 자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장생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영화 초입부, 두 사람이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라며 서로를 만지려해도 엇갈리고, 또 다시 '나 요기 있고, 저 조기 있지'라며 또다시 만나려 해도 결코 만나지 못한다.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거기'는 한곳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광대의 운명이다. 여기와 거기는 움직인다. 그리고 보면 광대란 참으로 우습고도 애달픈 운명의 소유자들이 아닌가? 그러니 광대들은 말한다. 체념하듯 외친다.

 

"징한놈의 이 세상, 한 판 신나게 놀다가면 그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