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교향곡 제5번 다단조 작품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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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 : 카를로스 클라이버(Carlos Kleiber)
연주 : 비엔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Wiener Philharmoniker)
녹음 : 1975
CD 가이드 20세기 명반 선정
푸르트뱅글러의 합창에 육박하는 충격적인 연주였지만 발매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논란의 여지를 남겨온 음반. 클라이버의 정확한 프레이징과 과감한 관악기의 사용, 총주와 피날레의 웅장한 파워 등이 기존의 개념을 완전히 새로 정립했다. 이에 버금가는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음반은 LP시대가지 거슬러 올라가도 그리 흔치 않을 터이다.
BEETHOVEN SYMPHONY NO.5 C MINOR OP. 67
정창관 (홍콩샹하이은행 부장)
"이렇게 운명이 문을 두드린다."라는 유명한 말이 나오는 베토벤의 교향곡 제 5번 C단조 작품번호 67은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교향곡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제 1악장 첫머리의 동기는 베토벤이 비인교외를 방황하며 걷던 고독의 산책길에, 숲속에서 들려오는 노랑새의 울음소리로부터 착상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베토벤의 전기작가인 신틀러(1775 - 1864)가 조작했다고 하는, 누구인가 방의 문을 두들길 때 그 음을 운명의 노크(KNOCK)로 감득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듯 하다.
베토벤은 이 곡을 1803년부터 준비하여 1808년 초에 완성하였다. 주제전개의 기법과 전곡의 긴밀한 구성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관현악 편성도 보통의 2관 편성에 피콜로, 콘트라파곳, 트럼본등을 추가하여 음량의 증가와 음색상의 새로운 효과를 내고 있으며 악식상으로는 제1악 첫머리의 소위 운명의 동기가 전곡에 걸쳐 나타나므로 해서 곡 전체의 통일이 이루어지고, 제 3악장과 제 4악장이 잇달아 연주되며, 더욱이 제 4악장의 재현부 직전에 제 3악장이 회상되는 점등 작곡기법상의 갖가지 연구가 교묘히 쓰여지고 있으며 우수한 창작력을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곡이 1808년 12월 22일 비인에 있는 안-데어-비인극장의 베토벤 작품발표회에서 초연되었을 때는 그의 연주회 중에서 가장 비참한 결과로 끝나고 말았다. 이 발표회에서는 지금의 제6번 전원교향곡이 제5번으로 인쇄되어 먼저 연주되었고 제5번 교향곡이 제6번으로 나중에 연주되었다.
▲ 교향곡 5번 작곡을 시작한 1803년의 베토벤
나는 현재 라이센스 레코드를 1700여장을 가지고 있다. 아마 국내에서 출반된 클래식 레퍼토리는 거의 다 가지고 있는 셈이며, 모두 다 들은 것이다. 이 중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은 국내에서 발매된 18종을 포함하여 43종을 가지고 있다. 처음 클래식음악에 입문했을 때 아는 곡이라고는 학창시절 음악시간에 들은, 주로 제목이 붙어 있는 운명, 미완성, 신세계이었으며, 제일 처음 구입한 레코드가 에르네스트 앙세르메가 스위스 로망드 관현악단을 지휘한 베토벤 교향곡 제5번이었다. 그 때에 처음 산 전축으로 들은 이 교향곡의 운명의 동기는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며, 같이 수록된 베토벤의 에그몬트서곡을 이 교향곡의 한 악장으로 착각했다. 그로부터 베토벤의 5번 교향곡은 무조건 구입하게 되었다. 타이머가 장치된 전축은 언제나 이 교향곡의 1악장으로 나을 잠에서 깨워 주었으며, '오늘도 열심히 성실히 살아야지'라고 두손을 불끈 쥐곤 했다.
레코드를 모으기 시작한 기간이 일천하여, 1913년 이 교향곡을 처음 녹음한 니키쉬, 1947년 나치스의 전쟁협력자 혐의에서 풀려난 푸르트뱅글러의 복귀음악 연주회 실황녹음(이 레코드는 조만간 라이센스로 출반 예정임), 바인가르터너, R. 쉬트라우스, 쿠나퍼츠부쉬등 한 세대이전의 지휘자가 녹음한 제5번은 거의 가지고 있지 않지만, 43종의 레코드중에서 가장 즐겨듣는 레코드는 1974년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비엔나 필하모니 관현악단과 녹음한 레코드이다. 어느 평론가는 이 레코드에 대해 " … 클라이버의 운명은 처절한 투쟁과 갈등을 통하여 인간 베토벤이 구가한 자유의 승리를 노래하고 있는 기념비적인 음반이다."라고 찬양하고 있지만, 나는 베토벤의 이 교향곡 자체에 대해서 이러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 여러 지휘자가 연주한 베토벤의 5번을 듣는 가운데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곡이 제일 좋게 들린다는 것이지, 그의 연주가 특별히 더 많은 메시지를 주는 것은 아니다.
▲ 교향곡 5번을 완성한 1808년의 베토벤
베토벤의 제5번 교향곡의 4악장중에서 특히 1악장을 즐겨 듣는다. 1악장의 연주시간은, 제일 빠른 죠지 쉘(1963 클리브랜드 관현악단)이 6 : 05로, 제일 느린 피에르 볼레즈(1968 뉴 필하모니 관현악단)이 9 : 14초로 기록되어 있지만 내가 조사한 바로는 죠지 쉘은 124마디의 제시부(연주시간 1 : 27초)를 반복하지 않는다. 만약 죠지 쉘이 제시부를 반복한다면 연주시간은 7 : 32초가 소요되는 것이기 때문에 제시부(연주시간 1 : 23초)를 반복하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77 베를린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연주시간 7 : 04초가 내가 가진 43장의 레코드중에서 가장 빠른 연주이다.
몇 년 전, 해외연수길에 독일의 수도 본에 있는 베토벤의 생가를 방문했다. 1920년부터 베토벤의 박물관으로 개장되어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는 생가에는 베토벤의 자필악보, 피아노, 보청기 및 초상화등의 유품이 진열되어 있고 베토벤이 태어난 방 한 가운데는 그의 흉상이 놓여 있다. 그 때에는 베토벤의 제5번 교향곡에 심취되어있던 때라, 방 한가운데에서 운명의 동기가 흘러나와 온 몸을 휘감아 싸는 감동을 느낀 적이 있다. 음악가에서 가장 중요한 청각을 잃어버리고서도 인류에게 훌륭한 유산을 물려 준 악성 베토벤에게 지고한 경외를 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가 "음악은 베토벤에서 시작해서 바하의 음악으로 끝난다."고 했지만 나는 베토벤에서 시작해서 여러 작곡가를 거쳐 마지막에 다시 베토벤의 음악으로 돌아갈 것 같다.
앞으로도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에 대한 레코드 수집은 계속될 것이며, 이 교향곡을 수집하다 보면 많은 지휘자와 관현악단을 만날 수 있어 좋다. 라이센스 레코드는 18종으로 국내 클래식음악 목록중에는 가장 많이 발매된 곡이며, 푸르크뱅글러는 이 교향곡을 9번이나 녹음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교향곡의 표제인 "운명"은 원반에는 찾아 볼 수 없으며 라이센스 레코드에만 운명교향곡이라고 적고 있다. 단 한 라이센스 레코드에는 영어로 "FATE"라고 적어 있지만, 이것은 국내 레코드제조회사가 독단적으로 표시한 것임에 틀림없다.
내가 유일하게 구입하고 있는 원반은 이 교향곡과 홀스트의 행성(THE PLANETS)뿐이다.
과연 명반이 존재하는가? 누구의 운명이 최고인가? 미학은 주관적이며 감상하는 자의 선택이다. 하지만 다수의 감상자가 뛰어난 연주라고 느끼고 비평가들이 명반이라고 칭한다면 그 음반은 명반이라고 불리워질 수 있을 것이다.
푸르트뱅글러의 운명이 여전히 두각을 나타내고 있을 즈음, 1974년 왕년의 명지휘자 에리히 클라이버의 아들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비엔나 필과의 연주로 운명교향곡을 선보인다. 이 음반은 출반되자 마자 메스콤은 센세이션한 반응을 보였으며 음반은 날개 돋친 듯 판매되었다. 베스트 셀러가 다 명반은 아니지만 그의 운명은 스테레오시대의 최상의 운명이 되어있다.
그는 1930년 7월 3일 베를린에서 태어나 카를이라고 명명되었는데, 그의 부친이 38년 나찌스와의 불화로 아르헨티나로 귀화함에 따라 스페인풍으로 카를로스라고 개명되었으며, 1980년 1월에 오스트리아 국적을 얻었으므로 현재는 오스트리아 지휘자라고 말할 수 있다.
에리히는 아들이 음악가가 되는 일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특별한 음악교육은 받지 않았으며, 부친의 권유로 스위스 연방공업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지만, 핏줄은 속일 수 없는 듯, 53년 부친의 반대를 물리치고 뮌헨의 오페레타 극장인 겔트너 프라츠 극장의 무급 견습지휘자로 그의 지휘자의 일생이 시작된다.
클라이버는 음반을 만드는 데에 소극적이었을까, 혹은 신중했을까. 그의 나이 43세인 1973년 데뷔반인 베버의 마탄의 사수가 드렌스덴에서 녹음되어 도이취 그라마폰 레이블로 발매된 후, 이듬해인 74년 이 운명이 녹음된다.
1악장 주제부의 템포는 빠르다. 전개부는 개성적이어서 강한 추진력 속에 세밀한 표정이 나타나고 있으며 또한 흐름의 자연스럼이 보전되어 있다. 3악장의 부드럽게 울리는 비에나 필의 현의 소리는 지휘자의 신선한 감각을 나타내고 있다. 연주에 즉흥성이 내재되어 반복을 단순한 반복으로 그치지 않고, 두번째는 첫번째 연주의 발전적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4악장에서는 지휘자의 즉흥성이 반복을 포함한 제시부와 재현부에 여실히 나타나 있는데, 특히 재현부의 대담한 움직임에는 이론적인 면을 뛰어넘는 번득이는 재치를 느끼게 한다.
86년에 국내에 라이센스로 출반된 이 음반은 음질도 양호하며 현재 CD(성음 DG 0397)로도 출반되어 있다.
베토벤 교향곡 제5번 다단조 작품67 : 1악장 Allegro con brio
베토벤 교향곡 제5번 다단조 작품67 : 2악장 Andante Con Moto
베토벤 교향곡 제5번 다단조 작품67 : 3악장 Allegro, 4악장 Allegro
투병속 걸작 만들어낸 베토벤
문학수/경향신문
얼마전 EBS TV를 통해 방영된 ‘제3회 EBS 국제 다큐멘터리 페스티벌’에는 흥미로운 다큐멘터리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베토벤의 머리카락’(Beethoven’s Hair)이라는 작품이 인상적이었지요. 혹시 보셨나요? 음악가와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자주 만드는 래리 와인스타인 감독의 수작(秀作)입니다. 2005년도 작품이지요.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빈필하모닉을 지휘한 베토벤 5번 ‘운명’.
이 다큐멘터리는 후세에 남겨진 베토벤의 머리카락 몇 올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사인(死因)을 밝히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그의 머리카락에서 일반인보다 100배가 넘는 납성분이 검출된 사실에 주목하지요. 결국 이것이 그를 괴롭혔던 귓병, 그리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원인이었을 거라고 추정합니다. 괴팍한 성품도 납중독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짐작하지요. 이와 더불어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이 발견됩니다. 병마와 싸우며 고통에 신음하다 죽어간 베토벤. 병명조차 알아내지 못하는 의사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곤 했던 그의 머리카락에서, 놀랍게도 모르핀 성분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모르핀, 그것은 진통제랍니다. 그래요. 베토벤은 차라리 육신이 찢기는 듯한 고통과 싸울지언정,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죽는 순간까지 ‘맑은 정신’으로 음악을 만들길 원했습니다. 그것은 운명에 맞선 처절한 투쟁이었지요.
1802년부터 빈 근교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살았던 베토벤은 그해 10월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써서 두 동생 앞으로 남긴답니다. 하지만 그는 자살하지 않았어요. 세상을 떠난 1827년까지, 적어도 25년이 넘는 세월을 병마와 싸우며 음악을 향한 열정을 남김없이 불태웠지요.
오늘 당신과 들을 음악은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이른바 ‘운명’이랍니다. 33세였던 1803년에 머릿속에 악상을 그리기 시작했고, 1807년 본격적으로 작곡에 돌입해 이듬해에 완성했지요. 귓병이 악화돼 청각을 잃기 시작하던 시점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육체의 병이 깊어지면서 불멸의 음악이 태어난 것이지요. 그의 걸작들은 대부분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 이후의 곡들이랍니다.
누구나 이 음악을 알고 있어요. 아마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클래식일 겁니다. ‘딴딴딴 따’하는 시작부, 소위 ‘운명의 동기’라고 말하는 첫 주제를 모르는 사람들은 정말 드물지요. 하지만 1악장부터 4악장까지 온전히 들으면서 감동에 젖어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답니다.
교향곡 역사에서 이처럼 격렬하게 문을 여는 1악장은 드물어요. 오케스트라 총주(總奏)가 운명의 동기를 1주제로 제시하고, 이어서 호른과 바이올린이 2주제를 노래하지요. 긴장감 넘치는 1악장이 끝나고 2악장은 부드럽고 어둡게 흘러갑니다. 이를테면 ‘긴장’과 ‘이완’인 셈이지요. 3악장에선 한층 더 가라앉다가, 마침내 4악장에서 모든 에너지가 폭발하지요. 마치 고통을 뚫고 솟아오른 햇살처럼, 뜨거운 환희가 울려퍼집니다.
언젠가 당신에게 말했지요? 같은 곡을 반복해 들으면서 그 곡의 ‘구조’를 느껴보라고요. 특히 베토벤 ‘5번’은 구조의 미학이 탄탄한 걸작입니다. 2년 전 타계한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1974년 빈필하모닉을 지휘했던 녹음을 권합니다. 70년대 최고의 명연으로 꼽히지요. 도이치그라모폰(DG)에서 발매했습니다.
거장으로 남은 아버지와 아들, 카를로스클라이버
20세기를 호령하던 지휘대 위의 마지막 신화
박정준/ 음악 칼럼니스트 아트센터 2006.07.13
2004년 7월에 타계한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 얘기를 해볼까합니다. 그의 죽음으로 거장 지휘자의 세기가 완전히 끝났다고 할 정도로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대단한 인물입니다. 그는 20세기를 호령하던 지휘대 위의 마지막 신화였습니다.
원고를 쓰면서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지휘한 슈베르트의 교향곡 3번을 듣고 있습니다. 베토벤 교향곡 3번을 듣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그가 지휘한 연주가 음반으로 남은 것이 없기 때문에 대신해서죠. 정통 독일-오스트리아계 지휘자면서도,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영웅>을 연주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추측하면서 그의 아버지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의 아버지 에리히 클라이버 또한 20세기 초반의 거장의 반열에 들었던 위대한 지휘자로 기억되고 있으며, 에리히 클라이버의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5번 ‘운명’,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이 워낙 뛰어난 연주라, 아마도 카를로스가 아버지를 의식한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죠.
카를로스는 위에서 얘기한 대로 에리히 클라이버의 아들로 1930년 베를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에리히 클라이버는 나치에게 절망을 느끼고 1935년 독일을 떠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합니다. 그래서 카를이었던 아들의 이름이 카를로스라고 스페인 식으로 바뀌게 된 것이죠. 에리히는 아들이 음악을 하는 것을 극도로 반대했고, 카를로스는 1950년대 취리히 공대에 유학해 아버지 몰래 지휘자 공부와 활동을 시작합니다.
1954년에 데뷔했고, 아버지 에리히는 1956년에 타계했습니다. 이후 그는 한 발 한 발 경력을 쌓으며, 어느 오케스트라, 어느 오페라 극장이든 모셔가고 싶어하는 1순위의 지휘자가 되었지만, 그 어디에도 얽매이기 싫어하는 성품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곳만을 찾아가 연주하는 철새 지휘자가 됩니다. 철새라고는 했지만, 자기가 연주하고 싶은 곳에서는 어디든 할 수 있었으니 대단한 일이죠.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다른 지휘자들과 달리 자기가 연주하고 싶은 곳에서, 자기가 연주하고 싶은 곡만을, 자기 뜻대로 연주하고, 또 그마저도 음반으로 만드는 것을 꺼려하는 편이어서, 그의 음반은 상당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연주했던 사람들은 주저없이 그가 평생 만나본 지휘자중에 최고라고 했으며, 그가 만드는 음악을 들었던 사람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만, 클라이버는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으로 살다간 음악가로서,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2대에 걸쳐 ‘희대의 거장’이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는 지휘자의 반열에 오른 유일무이한 케이스로서 클래식 음악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입신(入神)의 경지에 든 지휘자
클래식을 처음 듣는 분들은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을 카라얀이나, 번스타인의 연주로 듣게 되는데요, 베토벤 교향곡 5번이라면 칼 뵘이나, 카를로스 클라이버를 먼저 추천합니다. 물론 그 다음은 푸르트뱅글러입니다. 클라이버의 5번과 7번 연주(빈 필)는 워낙 유명하죠. 특히 베토벤 교향곡 7번 연주는 20세기 후반의 가장 주술적인 연주라 할만큼 뜨겁게 타오르며, 신들린 듯합니다. 그리고 카를로스 클라이버라면 빼놓을 수 없는 브람스 교향곡 4번 연주(빈 필)도 있습니다.
조금 더 나가, 클라이버의 진수를 담은 다른 음반들을 소개해 봅니다. 우선 베버의 <마탄의 사수>인데요, 많은 사람들이 이 연주들을 듣고 클래식에 흠뻑 빠지게 되었다고 하고, 저도 이 연주를 처음 들었을 때 이런 곡인줄 처음 알았습니다. 지루할거라고 미리 짐작하지 마세요. 소리가 작렬한다는 느낌, 그리고 3차원적이고 극적인 흐름이 악극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최고의 연주입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 삽입된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의 이중창의 주인공, 소프라노 군둘라 야노비츠와 에디트 마티스, 그리고 페터 슈라이어와 테오 아담의 호화 캐스팅, 그리고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연주입니다.
베토벤 교향곡 4번(뭔헨 바바리안 국립)의 연주도 최고의 연주중 하나이며, 6번 <전원>(바이에른 국립)의 연주도 추천할만합니다. 아참, 제가 지금 듣고 있는 슈베르트 교향곡 3번과 8번 <미완성>(빈 필)의 연주도 빼놓을 수 없군요.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와 <오텔로> 역시 명반의 반열에 올라있습니다. <오텔로>는 정식 녹음이 아니라 아쉽긴 한데, 두 연주에 모두에 주역으로 참여했던 것이 플라시도 도밍고입니다. 그 역시 당시에 자신이 연주하면서도 무척 감동적이었다고 했다네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도 빼놓을 수 없는 명연입니다.
마지막으로는 DVD를 통해 카를로스 클라이버를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오페레타 <박쥐>(오토 솅크 연출)는 우리나라 TV에서도 방영한 적이 있을 정도로 워낙 유명하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오토 솅크 연출)또한 20세기 후반의 최고의 배역진으로, 레퍼런스급 연주이자 영상물입니다.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역동적이면서도 유유자적한 지휘모습이 담겨있는 1989년 빈 신년음악회 DVD는 정말 꼭 보셔야 합니다.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단원들을 이끄는 그의 모습에서 비범함을 넘어선 이 20세기 마지막 전설적 ‘신선(神仙)’ 지휘자의 명성을 느끼게 될 겁니다. 사족이지만, 카를로스 클라이버 이외에는 세르주 첼리비다케 정도가 이런 경지였다고 할만하군요.
브라보! 카를로스 클라이버!
20세기 음악 유산의 마지막 상속자
정윤수(명지대 교수/오마이뉴스 2004-07-21)
'헤이리 음악 소풍' 때문에 베토벤의 음반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이번 주말 예정인데, 실은 사회학자 김종엽 선생에게 '모짜르트 소풍'을 부탁하였으나 원고 사정으로 연기되고 내가 대신 맡은 것이다. 이 일도 원래는 음악평론가 강헌 선생의 몫이었으나 그는 지금 세브란스 중환자실에 있다.
대책없이 떠맡고 나서 베토벤 음반을 정리하던 중인데, 아뿔싸,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난 7월 6일, 모친의 고향인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에서 숙환으로 별세한 그는 역시 슬로베니아 출신인 아내의 묘지 옆에 지난 10일 안장됐다고 한다. 향년 74세.
클라이버를 위하여 세 사람이 필요하다. 먼저 그의 대척점에 있던 카라얀이다. 20세기 후반의 클래식에 있어 '카이저'의 칭호를 받을 만한 카라얀의 생애는 확실히 은둔자 클라이버와 거리가 있다.
카라얀은 클래식이 20세기 전반기의 '실황 연주'에서 세련된 녹음과 '스타 마케팅'으로 옮겨가는 지점을 절묘하게 파악했으며 이를 그 누구보다 최상의 수준에서 활용했던 음악가였다. 그는 수십 대의 카메라를 동원해 자신의 지휘하는 장면을 녹화했으며 최첨단의 스튜디오에서 대중적인 레퍼토리를 수십차례 녹음했다. '클래식=카라얀'이라는 음반 마케팅의 공식을 그는 입증하였다.
반면에 클라이버는 스튜디오 녹음 대신 연주회장의 라이브를 절대적으로 존중하였다. 그의 음반은 손을 꼽을 정도인데 그중에서도 대부분은 라이브를 녹음한 것이다. 감상자에게는 불과 대여섯 장만 구입해도 되는 뜻밖의 기쁨도 있다. 어쨌거나 그는 조금이라도 빈 틈이 보이면 녹음은 물론 실황 연주마저 취소했으며 음반 산업자와 언론의 관심을 즐기지 않았다.
▲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명반들
그러나 이러한 차이만으로 클라이버와 카라얀을 대비할 수는 없다. 클라이버가 스튜디오 음반을 전혀 남기지 않은 것도 아니며 카라얀의 명성이 음반 마케팅으로 거저 얻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클라이버가 왜 한사코 스튜디오 녹음을 절제했으며 라이브 연주 또한 최상의 조건이 아니면 자주 회피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에 두 번째 인물, 그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아버지 에리히 클라이버는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아들은 물론 카라얀에 비해서도 음악사적인 비중이 결코 작지 않다. 다만 그는 멩겔베르크나 푸르트뱅글러처럼 스테레오가 아닌 모노 시대의 지휘자로 현재 들을 수 있는 그의 음반은 상태가 매우 열악하다.
에리히 클라이버는 아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다. '저주받은 예술가로서의 삶'을 물려주기 싫었던 것이다. 그의 전성기는 다름아닌 히틀러의 전성 시대. 모차르트 오페라에 있어 불멸의 유산을 남긴 에리히 클라이버는 그러나 히틀러 파시즘의 광풍이 몰아치고 예술가에 대한 탄압에 절정에 이른 1935년에 아르헨티나로 망명을 떠났다. 그때 다섯 살이었던 아들 '칼'의 이름을 아버지는 남미식으로 '카를로스'라고 바꿔버렸다. 파시즘에 대한 뼛 속 깊은 저항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2차 대전 이후 독일로 돌아왔지만 그의 시대는 이미 저물고 있었다. 대신 카라얀의 시대가 열렸다. 푸르트뱅글러와 에리히 클라이버는 히틀러 파시즘 속에서도 나름대로 지켜온 '독일 음악의 유산'이 카라얀에게 이어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이 지점에서 세 번째 인물 빌헬름 푸르트뱅글러가 등장한다. 독일 음악 유산의 위대한 상속자인 푸르트뱅글러는 히틀러 시대에 독일에 남았다는 이유로 무대에 서지 못했다. 나중에야 몇몇 기록과 증언에 의하여 복권되지만 그가 베를린 필에 다시 서는 데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기술 발전에 따른 스튜디오 녹음이 서서히 대세를 확보해가는 시절에 푸르트뱅글러는 오로지 '라이브'을 고집하였으며 복권 후 몇 해 동안 베를린 필의 음악적 제사장으로 최후의 명연을 남겼다.
그럼에도 세상의 운명은 카라얀 쪽으로 기울었다. 1933년에 나치에 입당했고 히틀러의 총애를 받으며 빈 국립오페라극장, 베를린 필 등을 독점하다시피 한 카라얀은 그러나 놀랍게도 47년에 해금되었으며 EMI의 명프로듀서 월터 레그를 만나 전성기를 열었다. 클래식이 '레코딩' 산업과 판촉 활동을 겸한 연주회로 재편될 것을 예견한 월터 레그는 레코딩 전문악단 필하모니아를 설립해 카라얀에게 맡겼고 이후 카라얀은 스튜디오 시대의 황제가 되었다.
게다가 54년에 푸르트벵글러마저 죽고 말았다. 푸르트뱅글러는 한사코 '히틀러 군악대장'에게 독일 음악의 유산이 이어지는 것을 막고자 했고 에리히 클라이버도 카라얀과 대척에 섰으나 그마저도 56년에 사망하고 만다. 남은 사람은 브루노 발터였으나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콜럼비아 교향악단으로 명연을 남기고는 역시 노환을 이기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카라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1955년에 베를린 필에 입성한 카라얀은 이듬해 '종신' 예술감독직까지 맡아 독보적인 아성을 구축했다.
그 무렵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취리히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후 아버지 몰래 뮌헨의 3류 극장에서 견습생으로 음악을 배웠다. 아버지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던 무렵에 지휘자로 데뷔한 그는 1974년 독일 바이로이트 음악제를 통해 뒤늦게야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한다.
그는 단 한번 슈투트가르트의 음악감독을 2년 쯤 맡은 것 말고는 평생 동안 상임이나 무슨 감독직을 맡지 않았다. 뮌헨, 빈, 류블랴냐 등의 교향악단과 연주를 했지만 전속은 맺지 않았다. 그는 다만 지휘자였고 음악가였다. 89년에 카라얀이 사망하자 그 후임으로 거론되었지만 정작 클라이버는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고 세상 밖에 머물렀다. 연락이 두절되기 일쑤였으며 거처도 일정하지 않았다. 그의 명성에 비하여 사망한 지 보름 후에나 그 소식이 알려진 까닭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명반들
그러나 이러한 차이만으로 클라이버와 카라얀을 대비할 수는 없다. 클라이버가 스튜디오 음반을 전혀 남기지 않은 것도 아니며 카라얀의 명성이 음반 마케팅으로 거저 얻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클라이버가 왜 한사코 스튜디오 녹음을 절제했으며 라이브 연주 또한 최상의 조건이 아니면 자주 회피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에 두 번째 인물, 그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아버지 에리히 클라이버는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아들은 물론 카라얀에 비해서도 음악사적인 비중이 결코 작지 않다. 다만 그는 멩겔베르크나 푸르트뱅글러처럼 스테레오가 아닌 모노 시대의 지휘자로 현재 들을 수 있는 그의 음반은 상태가 매우 열악하다.
에리히 클라이버는 아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다. '저주받은 예술가로서의 삶'을 물려주기 싫었던 것이다. 그의 전성기는 다름아닌 히틀러의 전성 시대. 모차르트 오페라에 있어 불멸의 유산을 남긴 에리히 클라이버는 그러나 히틀러 파시즘의 광풍이 몰아치고 예술가에 대한 탄압에 절정에 이른 1935년에 아르헨티나로 망명을 떠났다. 그때 다섯 살이었던 아들 '칼'의 이름을 아버지는 남미식으로 '카를로스'라고 바꿔버렸다. 파시즘에 대한 뼛 속 깊은 저항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2차 대전 이후 독일로 돌아왔지만 그의 시대는 이미 저물고 있었다. 대신 카라얀의 시대가 열렸다. 푸르트뱅글러와 에리히 클라이버는 히틀러 파시즘 속에서도 나름대로 지켜온 '독일 음악의 유산'이 카라얀에게 이어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이 지점에서 세 번째 인물 빌헬름 푸르트뱅글러가 등장한다. 독일 음악 유산의 위대한 상속자인 푸르트뱅글러는 히틀러 시대에 독일에 남았다는 이유로 무대에 서지 못했다. 나중에야 몇몇 기록과 증언에 의하여 복권되지만 그가 베를린 필에 다시 서는 데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기술 발전에 따른 스튜디오 녹음이 서서히 대세를 확보해가는 시절에 푸르트뱅글러는 오로지 '라이브'을 고집하였으며 복권 후 몇 해 동안 베를린 필의 음악적 제사장으로 최후의 명연을 남겼다.
그럼에도 세상의 운명은 카라얀 쪽으로 기울었다. 1933년에 나치에 입당했고 히틀러의 총애를 받으며 빈 국립오페라극장, 베를린 필 등을 독점하다시피 한 카라얀은 그러나 놀랍게도 47년에 해금되었으며 EMI의 명프로듀서 월터 레그를 만나 전성기를 열었다. 클래식이 '레코딩' 산업과 판촉 활동을 겸한 연주회로 재편될 것을 예견한 월터 레그는 레코딩 전문악단 필하모니아를 설립해 카라얀에게 맡겼고 이후 카라얀은 스튜디오 시대의 황제가 되었다.
게다가 54년에 푸르트벵글러마저 죽고 말았다. 푸르트뱅글러는 한사코 '히틀러 군악대장'에게 독일 음악의 유산이 이어지는 것을 막고자 했고 에리히 클라이버도 카라얀과 대척에 섰으나 그마저도 56년에 사망하고 만다. 남은 사람은 브루노 발터였으나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콜럼비아 교향악단으로 명연을 남기고는 역시 노환을 이기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카라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1955년에 베를린 필에 입성한 카라얀은 이듬해 '종신' 예술감독직까지 맡아 독보적인 아성을 구축했다.
그 무렵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취리히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후 아버지 몰래 뮌헨의 3류 극장에서 견습생으로 음악을 배웠다. 아버지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던 무렵에 지휘자로 데뷔한 그는 1974년 독일 바이로이트 음악제를 통해 뒤늦게야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한다.
그는 단 한번 슈투트가르트의 음악감독을 2년 쯤 맡은 것 말고는 평생 동안 상임이나 무슨 감독직을 맡지 않았다. 뮌헨, 빈, 류블랴냐 등의 교향악단과 연주를 했지만 전속은 맺지 않았다. 그는 다만 지휘자였고 음악가였다. 89년에 카라얀이 사망하자 그 후임으로 거론되었지만 정작 클라이버는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고 세상 밖에 머물렀다. 연락이 두절되기 일쑤였으며 거처도 일정하지 않았다. 그의 명성에 비하여 사망한 지 보름 후에나 그 소식이 알려진 까닭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지휘한 베토벤 5번 교향곡
'레코딩을 허락하는 것은 내겐 공포에 가까운 일이다’
클라이버의 말이다. 여기에는 몇가지 뜻이 숨어 있다. 일차적으로는 그의 음악적 취향을 보여준다. 어두컴컴한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 대신 카메라, 마이크, 음향 설비를 대상으로 연주하는 것을 그는 기피했다.
어쩌면 카라얀을 무의식적으로 의식한 말일 수도 있다. 뛰어난 지휘자이면서도 동시에 정교한 연출자이자 20세기 음반산업의 마케팅 팀장이기도 했던 카라얀에 비하여 어쩌면 클라이버는 19세기에 형성된 서구 클래식의 마지막 정통파로 남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음악의 주술적 요소를 존숭했다는 점. '라이브'가 갖는 일회적인 엄숙성, 피날레가 끝나면 박수에 묻혀 영원 속으로 저장되는 '실황 연주'의 숙명에 대하여 클라이버는 고개를 숙였던 것이다.
히틀러의 생일 전야제에 불려가서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지휘해야만 했던 푸르트뱅글러가 일체의 스튜디오 녹음을 거절한 것처럼 클라이버는 적어도 베토벤에 있어서 '지금 이 순간'의 현장성과 일회성, 요컨대 그 순간에만 존재하고 영원히 소멸하고 마는, 그러나 단순히 '공기의 흔들림'으로 그치지 않고 부채꼴의 연주자와 말굽형의 관객들 사이의 한 정점에 서서, '영원 속으로 소멸'하는 음악적 제의를 집전하는 제사장의 역할을 그는 맡았던 것이다.
클라이버의 불가피한 선택은 틀림없이 음악 산업이라는 대세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의 음악적 가치와 명성은 높아졌으며 은둔할수록 세상은 더욱 그를 원했다. 관습적인 데뷔, 상투적인 레코딩, 상업성이 뻔히 보이는 연주회 등으로 오늘날 클래식 산업은 오히려 사양 산업이 되고 말았는데 그 화려한 패잔병들 틈에 끼지 않고 클라이버는 은둔과 사색의 만년을 선택했던 것이다.
▲ 라이브 연주의 백미로 꼽히는 클라이버 지휘의 베토벤 4번 교향곡
몇 장의 음반만 남기고 그는 떠났다. 당연히 그가 남긴 것은 몇 장의 음반이 아니라 세속을 거절하고 '20세기의 마지막 예술가'로 버틴 그의 생애다. 바이에른 국립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베토벤 교향곡 4번의 실황 연주 음반은 이채롭게도 제작사인 '오르페오'가 관객의 환호까지 녹음으로 남겼는데, 이제 듣게 될 4악장의 마지막 대목과 열렬한 박수는 고인이 된 카를로스 클라이버에게 이 세속 도시의 사람들이 바치는 가장 경건하고 아름다운 장송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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